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예조프 (문단 편집) === 초기 === [[소련]]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예조프는 예조프가 잘 나가던 시기에는 공장 노동자로 기록되었으나 예조프가 숙청된 후에는 사실 러시아 제국군 군악대에 복무한 부농이며 포주로 기록이 바뀌었다. 이는 예조프가 직접 자백한 내용이긴 하지만 예조프를 최대한 나쁜놈으로 만들기 위한 강압적 수사 결과에서 나온 것은 감안해야 한다.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이반 예조프가 군악대 근무 시절에 만난 지휘자의 하녀였다. 예조프는 자신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 사람이 아니며 그저 리투아니아어를 알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은 [[초등학교]]까지만 받았고, 1909년에서 1915년까지는 재봉사 조수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먹고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1917년에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17년 예조프는 [[공산당]]의 "회계 및 분배부"로 전근되었고, 이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 2월 이후 공산당의 여러 지역위원회의 서기로 일했다.1929년부터 1930년까지 농업부의 차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당직을 거쳐 승진했다. 농업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쿨라크]][* 자영농들을 의미한다. 경작지가 크든 작든 땅을 소유한 농부들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체제의 관점으로 봤을 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악화된 식량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자영농계급에 대한 유화책으로서 신경제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원칙적으로 계획경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가뜩이나 1930년대로 접어들며 스탈린이 실권을 잡고 중공업 분야를 최우선적으로 육성하게 되면서 잉여인력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투입됐고 이들을 먹일 식량은 이들이 떠나온 바로 그 농촌에서 조달해야 했다. 그 목적을 위해 소련 전역에서 본격적인 농업집단화 조치가 이루어졌고 자영농계층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항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론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자영농계층에 대한 숙청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고 더이상 미뤄야 할 이유가 없어진 시점인 1930년에 농업과는 별 관련도 없던 예조프가 농업부차관으로 역임했다는 것은 그가 중앙정부의 명백한 의도에 의해 그 자리에 앉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대숙청 이전부터 예조프는 당내에서 숙청 전문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리와 집단화를 경험하게 해주었고 이들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부서에서 일하면서 그는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들이 여전히 많이 들어가 있는 경제관료들이나 기술자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으며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처리하는 데는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32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파벌 내에서는 급진파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거두였다.] 속해있었는데, 기존의 대학 학제를 없애고 공장과 연계된 현장교육 + 기술교육 기관으로 바꿔버리자고 주장해서 온건파들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가 거두였다.] 극딜을 얻어맞게 된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가던 시기는 밀어붙이던 기존 속도를 조금 줄이고 숨을 고르자는 분위기가 대세여서 더 얻어맞은 감도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